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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서 3부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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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2 편
종교적 믿음의 기초



.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
. 1934년


102:0.1 믿음 없는 유물론자에게 인간은 우연한 진화일 뿐이다. 죽음 이후 생존에 대한 인간의 희망은 허구이다;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재능도 죽고 나서 사라지도록 운명이 정해졌고, 죽음은 영원히 잊혀지고 혼이 소멸되는 길고도 외로운 밤이다. 필사자로 존재하던 현세의 태양 밑에서 살고 땀흘린 것은 냉혹하고 잔인한 물질 우주가 정해놓은 운명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의 종말, 영원한 운명은 아니다. 그러한 환상은 단지 영적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물질적 철학의 기계론적 궤변에 직면하여 용감하게 싸우며, 복잡한 배움의 혼란과 왜곡으로 인하여 눈이 먼, 어떤 헤매는 사람이 절망에 빠져 내뱉은 외침일 뿐이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믿음으로 손을 뻗으면, 이 절망의 운명은 사라져 버린다.

인간의 도덕적 의식이 물질 가치가 영적인 가치로, 시간 세계에서 영원으로 옮겨질 수 있다고 깨달을 때, 이 구원을 주는 믿음은 인간의 마음에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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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믿음의 확신

102:1.1 최고의 성취를 향한 믿음의 길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인간의 마음에 완전을 향한 갈망이 있어야 한다. 누구든지 신의 뜻을 행하고자 한다면, 진리의 길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은 사랑을 받기 위하여 알아야 하지만, 신성은 알기 위하여 사랑을 받아야 한다.”라는 말은 정말로 옳은 말이다. 어린아이처럼 의지하는 것은 사람이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것을 보장하지만, 진보는 완전히 성장한 사람의 확신에 찬 믿음과 힘차고 활발한 실천에 달려 있다.

종교적 믿음은 영원한 영적 프로그램에서 입증된다. 지식과 이성이 우리에게 해 줄 수 없는 것을, 참된 지혜는 믿음이 종교적 통찰력과 영적 변화를 성취하라고 충고한다.

유란시아에서 진리의 계시는 반란으로 고립되었기 때문에, 일시적 우주론과 혼동되어 왔다. 과학을 알수록 너희는 확신이 줄어들지만, 종교는 믿을수록 확신이 늘어난다.

과학의 확실성은 지능에서 진행되지만 , 종교의 확신은 전체 성격의 기초에서 솟아나온다. 과학은 지성의 이해력에 호소하고, 종교는 육체ㆍ지성ㆍ영의 충성과 헌신에, 심지어 전체 성격에도 호소한다.

하나님은 너무도 실제적이고 절대적이어서 소위 기적의 증거도 제시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을 알게 되며, 우리의 믿음은 무한한 그의 실체에 속에서 전적으로 우리의 개인적 참여에 기초를 두고 있다.

102:1.6 사람에게 깃드는 생각 조절자는 혼 속에서 완전을 찾으려는 갈망을 어김없이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이 높고 완전한 도덕적 성격자보다 더 높은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우리의 갈급하고 유한한 개념 속에서 하나님은 그 개념 보다 못한 어떤 것도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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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종교와 실체

102:2.1 관찰하는 지성인과 분별하는 사람들은 동료들의 생활에서 종교를 발견할 때 그 종교를 알아본다. 종교는 정의를 내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다 종교의 사회적ㆍ지적ㆍ도덕적ㆍ영적 열매를 알아본다.

진정한 종교적 확신의 특징 중에 하나는영적인 표현이 너무 침착하고 부드러워서, 결코 자기중심적이거나 이기적인 행복감에 대한 인상을 결코 전하지 않는 것이다. 종교적인 힘은 개인의 특권이 아니라 모든 지혜의 영원한 근원과 인간의 숭고한 파트너쉽이 해결되어 가는 과정이다.

종교적 체험의 요인을 파악하고 분석하기는 어렵지만, 그러한 종교 실천가들이 마치 영원자가 계신 앞에 이미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을 관찰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종교주의자들은 현세의 풍조에 본래 있는 흥망으로 인하여 서두르는 고달픔과 고통스러운 압박에서 실질적으로 벗어나서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생리학ㆍ심리학ㆍ사회학의 법칙이 설명하지 못하는, 안정된 성격과 평온한 성품을 나타낸다.

시간은 지식을 얻는 데 변함없이 들어가는 요소이다. 지식은 영원히 추구하는 것이다. 너희는 언제나 배우고 있지만, 결코 절대 진리를 완전히 아는 데까지 도달할 수 없다. 영적 빛을 받은 종교적인 혼은 그것을 알며, 지금 안다. 이 심오하고 긍정적인 확신은 인간이 지혜로 이룬 흥망성쇠에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과학의 발견조차도 인간의 체험에 대한 의식에서 진정으로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지성은 통일이다. 필사자의 의식은 지성 수준에서 살고, 부여받은 지성의 눈을 통해서 우주의 실체들을 파악한다. 에너지ㆍ지성ㆍ영이 최상 존재 안에서, 또 최상 존재로서, 체험으로 통일됨을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고, 언젠가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지성이 물질적 사물, 지적 의미를 가진 것, 영적 가치 기준을 확실히 알고 있지 않으면, 지성은 실체의 다양성을 이렇게 통일하는 데 결코 성공할 수 없다.

102:2.6 통일성은 철학을 통한 인간의 체험에서 가장 잘 발견된다. 진정한 철학적 활력의 혼과 에너지는 필사자의 영적 통찰력이다.

지적인 종교적 개념의 고정화는 영적 죽음과 동등하다. 사상 없는 종교를 상상할 수 없지만, 일단 종교가 하나의 사상으로만 전락했을 때, 종교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 종교는 단지 일종의 인간 철학이 된 것이다.

참된 종교는 행동해야 한다. 실제로 사람이 종교를 가졌을 때, 아니면 그보다도 종교가 사람을 참으로 지배하도록 버려둘 때, 행동은 종교의 결과가 될 것이다. 종교는 단지 생각만 하거나, 실행이 없이 느낌만으로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종교는 행동한다. 빗나간 종교적 확신이 피비린내 나는 박해를 낳았지만, 언제나, 늘 종교는 무엇인가 행한다. 종교는 힘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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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식, 지혜, 통찰력

102:3.1 지능의 부족이나 교육의 빈곤은 어김없이 상급의 종교적 달성을 불리하게 만든다. 종교에서 지적 요소가 중요하지만 이 요소가 지나치게 발달하면 마찬가지로, 때때로 무척 장애가 되고 곤란해진다. 종교는 다음의 역설적 필요 밑에서 줄곧 수고해야 한다:

종교적 억측은 그 대상을 변조한다. 억측은 종교를 무언가 물질이거나 인본주의인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논리적 사고를 맑게 하지 못하도록 직접 방해한다. 종교는 세상과 영원히 대조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주의 물질 수준과 영 수준 사이에 체험적 연결―모론시아 모타, 즉 진리를 헤아리고 통일을 파악하는, 철학을 뛰어넘는 민감성―이 없어서 생겨난다.

물질적 느낌, 인간의 감정은 이기적 행위로 바로 이끈다. 종교적 통찰력, 영적 동기는 종교 활동으로, 사회에 봉사하고 이타심으로 자선을 베푸는 사심 없는 행위로 바로 이끈다.

한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낼 때, 말할 수 없는 승리에 들뜬 상태를 체험하고, 동료들과 접촉하도록 재촉을 받는다. 그가 하나님을 찾아낸 것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료들이 생기를 되찾게 하고 고귀하게 만들려고 자기 혼속에서 영원한 선이 넘쳐흐르게 두는 것이다. 참된 종교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회에 더욱 봉사하게 만든다.

과학은 사실을 의식하게 만들고, 종교는 가치를 의식하게 만든다. 가치, 참된 실체를 조화되게 의식하는 것은 성격 실체, 곧 최대한의 존재를 깨닫고, 이와 함께 바로 그 성격이 살아남는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102:3.6 지식은 사람에게 자리를 정해 주며, 사회 계층과 계급 제도를 낳는다. 종교는 봉사하는 길로 이끌고, 윤리와 이타주의를 창조한다. 계시는 사람을 해방하고 영원한 모험을 떠나게 한다.

과학은 사람을 분류한다; 종교는 심지어 네 자신과 같이 사람을 사랑한다; 지혜는 다른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우한다; 계시는 사람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과의 파트너쉽 능력을 드러낸다.

과학은 문화 단체를 만들려고 헛되이 애쓴다. 종교는 영의 단체를 낳는다. 철학은 지혜의 단체를 위하여 애쓴다. 계시는 영원한 단체, 파라다이스 최후 군단을 묘사한다.

지식은 사람이 성격을 가진 사실에 긍지를 가지게 하며, 지혜는 성격의 중요성을 의식하는 것이다. 종교는 성격의 가치를 인식하는 체험이요, 계시는 성격이 살아남는 것을 보장한다.

과학은 한 없는 우주의 부분들을 분석하려고 한다. 종교는 우주 전체를 붙잡는다. '스스로 계신 이'가 지은 우주는 한이 없다. '스스로 계신 이'가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인 것을 우리(멜기세덱)는 증언한다.

102:3.11 과학은 신이 하나의 사실임을 가리키고, 철학은 한 절대자가 계신 것, 종교는 하나님이 자애로운 영 성격자임을 제시한다. 계시는 신이 계신 사실, 절대자 관념, 하나님의 영적 성격이 하나이고, 우리의 아버지인 것을 제시한다.

지식의 추구는 과학이며, 지혜의 탐구는 철학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종교요, 진리를 갈급하게 찾는 것은 하나의 계시이다. 그러나 사람이 우주를 꿰뚫어보는 영적 통찰력에 현실의 느낌을 붙여놓는 것은 깃드는 생각 조절자이다.

과학에서 사상은 실현되는 표현보다 앞서며, 종교에서 실현하는 체험은 사상의 표현보다 앞선다. 진화적으로 믿으려는 의지와 깨우친 이성, 종교적 통찰력, 계시의 결과로 믿는 의지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진화 종교는 흔히 사람이 하나님 개념들을 지어내게 만든다. 그리스도 미가엘이 땅에서 사신 인생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사람에게 계시하는 현상을 바라본다. 진화는 하나님을 사람 모습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계시는 사람을 하나님 답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과학은 오로지 처음 원인들에 만족하고, 종교는 최상의 성격에, 철학은 통일에 만족한다. 계시는 이 세 가지가 하나이며, 모두가 선한 것을 확인한다. 우주에서 선한 것은 영원히 실재하는 것이요, 실재하는 것은 선한 것이요, 선한 것은 실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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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체험에 대한 사실

102:4.1 너희 속에 생각 조절자가 계시기 때문에, 너희가 인간이든 초인간이든, 다른 지성을 의식하는 것 만큼,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더 이상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너희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법은 “그리스도 안에 있던 지성을 너희 안에 있게 하는” 기법과 같다.

인간의 체험은 무엇인가? 활발하고 궁금해 하는 자아와 활발하고 바깥에 있는 어느 다른 실체 사이에 생기는 상호 작용이다. 체험하는 사실은 자기 의식과 더불어 다른 존재, 즉 다른 것, 다른 지성에서 그리고, 다른 영들의 합에서 발견된다.

사람은 아주 일찍부터 세상이나 우주에서 혼자가 아님을 의식한다. 남의 생각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자의식이 발달한다. 믿음은 이 자연스러운 체험을 종교로 바꾸며, 이것은 남의 생각의 실체―근원ㆍ본성ㆍ운명으로서―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지식은 언제나 개인적인 체험이다.

우주에서 영이 되기 전에 인간의 진보는 하나님의 본성과 순수하고 참된 영의 실체, 이 두 가지에 대한 이 잘못된 개념들을 스스로 벗어버리는 체험에 있다. 신(Deity)은 영(spirit) 그 이상이지만, 상승하는 인간을 위한 유일한 가능성은 영적인 접근뿐이다.

기도(prayer)는 정말로 종교적 체험의 일부이지만, 현대 종교에 의해 잘못 강조되어 왔으며, 더욱 중요한 예배(worship)의 교감을 소홀히 했다. 예배를 통해 지성의 성찰력이 깊어지고 넓어진다. 기도는 인생을 풍요롭게 하지만 예배는 운명을 밝혀준다.

102:4.6 계시된 종교는 인간 존재의 요소를 통일하고 있다. 계시는 역사, 조정된 지리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사회학, 심리학을 통합한다. 영적인 체험은 우주에 있는 인간의 실재하는 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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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의도적 잠재력의 우월성

102:5.1 동물의 원시적 두려움이 하나님에 대한 끊임없는 예배와 우주에 대한 경외감으로 변화될 때, 바로 이 의도한 우월성은 지성의 개념 작용이 진화하는 데서 나타난다. 원시인은 믿음보다 종교적인 공포를 더 가졌지만, 영적 잠재력의 우월성은 살아있는 믿음으로 전환될 때 증명되었다.

너희는 진화 종교를 심리학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몸소 체험하는 종교를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도덕은 전능한 통제자(신)를 드러내지만, 종교는 모두를 사랑하는 아버지를 드러낸다. 이것은 종교의 영적 잠재성이 진화된 도덕의 의무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도덕은 가치를 인식할지 모르지만, 오직 종교가 그러한 가치를 보존하고, 높이고, 영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종교는 모두를 사랑하는 아버지, 즉 예배와 사랑을 받을 하나님을 드러낸다. 이것은 종교의 영적 잠재력이 진화된 도덕의 실제 의무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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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종교적 믿음의 확실성

102:6.1 종교적 두려움은 철학적으로 제거하고, 과학의 꾸준한 진보는 거짓 신들(gods)의 죽음을 크게 높인다. 생명존재와 창조자 사이의 관계는 살아있는 체험이고, 힘찬 종교적 믿음이며, 이를 정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다.

원시인이 섬기던 신들은 자신의 그림자보다 더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살아 있는 하나님은 신성한 빛이요, 그 빛이 중단되는 것은 모든 공간에서 창조의 그림자를 만든다.

철학적 성취의 종교 주의자는 개인에게 구원을 주는, 개인적으로 대하는 하나님을 믿는다. 종교인은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사랑은 종교의 본질이며 뛰어난 문명의 원천이다.

믿음은 있음 직한 철학적 하나님을 개인의 종교적 체험에서 확실한 구원의 하나님으로 변화시킨다. 회의론은 신학 이론에 도전할지 모르지만, 개인적인 체험에서 믿을 수 있는 신뢰는 믿음으로 성장한 확신의 진실을 확인한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오로지 믿음으로, 개인적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 삶과 관련된 많은 부분에서, 우주 실체와 접촉할 때, 그러한 의미와 가치가 살아있는 믿음으로 접근할 때 확실한 것이 체험될 수 있다.

102:6.6 비록 이성은 언제나 믿음을 의심할 수 있지만, 믿음은 언제나 이성과 논리를 보완할 수 있다. 사람이 진리로 하나님을 알 수 있지만, 하나님을 이해하기-설명하기- 위해서는 온 우주의 사실을 탐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체험과 하나님의 사실에 대한 무지의 엄청난 간격에는 오직 살아있는 믿음이 있어야만 메워질 수 있다. 이성만 가지고 무한한 진리와 우주적인 사실을 조화시킬 수 없다.

믿음은 반드시 의심을 이기며, 이는 믿음이 적극적이고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 영적 확신에 대한 증거는 영의 사회적 열매에 있다. 예수는 말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가 친구들을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리라.”

하나님은 과학에서 하나의 가능성이요, 심리학에서 바람직한 것이며, 철학에서 있음직한 것, 종교에서는 확실히 있는 것, 종교적으로 체험하는 사실이다. 사람이 쉽게 믿는다는 이유로, 과학은 종교적 체험을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

틀림없이 높은 것(예: 혼과 영)이 틀림없이 낮은 것(예: 단세포)에서 나왔다고 현재의 반론을 되풀이할 때, 과학적 유물론은 파산으로 향하게 된다. 의도를 가진 창조자의 활동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유기체의 진화는 하나의 사실이다. 유물론은 인생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예수의 복음은 모든 필사자를 엄청나게 향상시키고 하늘 같이 높인다. 필사자의 존재는 사람이 위로 뻗은 손과 신이 아래로 뻗은 구원의 손이 만나는 실체를 깨닫는, 흥미를 자아내는 황홀한 체험이라고 상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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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신성한 자의 확실성

102:7.1 우주의 아버지는 스스로 존재하므로 설명이 필요 없다. 그러나 너희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를 확신할 수 없다. 하나님과 우주는 동일하지 않으니, 하나는 원인이요 다른 하나는 결과이다. 원인은 절대적이고 무한ㆍ영원하고 변함이 없다. 결과는 시공에서 일어나며, 초월성이 있지만 항상 바뀌고 언제나 성장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주에서 스스로 원인이 된, 하나 뿐인 사실이다. 그는 사물과 존재들로 이루어진 온 창조의 질서ㆍ계획ㆍ목적의 비밀이다. 어디에서나 변하는 우주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법에 의해 규제되고 안정된다.

하나님 없이 종교를 발명하려고 하는 자는 나무 없이 열매를 모으고, 부모 없이 아이들을 가지려 하는 자와 같다. 너희는 원인 없이 결과를 가질 수 없다. 오로지 '스스로 계신 이'만 원인이 없다. 종교적 체험이 일어나는 사실은 하나님이 계심을 가리키며, 사람이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그러한 하나님은 성격을 가진 신인 것이 틀림없다.

사람은 하나님을 부인해도, 선하고 정직할 수도 있고, 인도주의적 성품을 더할 수 있다. 그러한 체험에는 살아남는 가치, 곧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체험이 빠져 있다. 그러한 필사 체험에는 겨우 사회적 열매는 열려도, 영적 열매는 열리지 않는다.

종교의 지적(知的) 표시는 확신이다. 사회적 열매는 사랑과 봉사이다.

102:7.6 하나님을 아는 개인은 미신과 전통, 그리고 현대의 유물론 경향 속에서 하나님 찾아내는 길을 가로막는 문제들에 대해 무지한 것이 아니다. 모든 방해물과 마주쳐서 이겼고, 살아있는 믿음으로 이겨내고, 영적 체험의 고지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반대자들이 영리하기 때문에, 확신의 느낌을 주장하기 두려워한다. 이 여러 물음에 대답하고 이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는 눈부신 지성이 요구된다. 믿음의 확실성은 그런 모든 피상적 논쟁을 다루는데 가장 좋은 기법이다.

만약 과학, 철학, 사회학이 참된 종교의 선지자들과 대항하여 독단적이 된다면,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그런 근거없는 독단적 태도에, 독단적 태도로 대답해야 한다. 한 신자의 개인적 체험이 독단에 도전받는다면, 사람이 체험할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 믿음으로 태어난 이 아들은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바로 그 독단으로, 자기가 실제로 우주의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말로 대답할 수 있다.

오로지 무조건의 실체, 한 절대자가 감히 한결같이 독단을 주장할 수 있다. 독단을 주장하려고 가정하는 자는, 일관성이 있다면 머지않아 에너지 절대자, 보편적 진리, 무한한 사랑의 품으로 끌려감이 틀림없다.

우주 실체에 이르는 비종교적 접근이, 믿음이 증명되지 않은 상태를 이유로 감히 믿음의 확신에 도전하면, 영을 체험한 사람은 마찬가지로, 과학이 다루는 사실과 철학 관념들이 마찬가지로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에 독단으로 도전하는 길을 택할 수 있다.

모든 존재 중에서 가장 피할 수 없고, 모든 사실 중에서 가장 실제적이며, 모든 진리 가운데 가장 생생하고, 모든 친구 가운데 가장 사랑이 많으며, 모든 가치 중에서 가장 신성한 하나님에 관하여, 우리는 모든 우주 체험 중에서 가장 확실히 해 둘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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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종교의 증거

102:8.1 종교의 효력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증거는 인간이 체험하는 사실에 있다. 죽은 뒤에 살아남고 싶은 갈망을 가진 자는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려 한다. 이것이 모든 종교의 핵심이다. 그러나 구원의 값으로 그 신이 무엇을 요구하는가에 대하여 여러 종교는 의견이 다르다.

우리는 종교를 그에 수반되는 문명의 상태에 따라 판단할 수 없다. 차라리 한 문명의 참 본질을 자체 종교의 순수함과 고상함에 따라서 추정하는 것이 좋다. 세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많은 종교 스승은 거의 교육을 받지 않았다. 세상의 지혜는 영원한 실체들을 믿는 유익한 믿음을 실천하는 데 필요하지 않다.

다른 시대에 있던 여러 종교의 차이점은 사람이 현실을 다르게 이해하고 도덕적 가치, 윤리적 관계, 영적 실체들을 사람이 다르게 인식하는 데 있다.

사람은 최선 개념과 이상으로 하나님을 생각했다. 역사적 종교도 그 종교가 인정하는 가장 높은 가치 기준으로부터 하나님을 만들어냈다. 모든 지적 인간이 그가 아는 바 가장 좋고 가장 높은 것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인다.

종교가 이성과 지적 표현 방식으로 격하될 때, 자체의 윤리적 문화와 도덕적 진보의 기준에 따라서 판단하는 대로, 종교는 언제나 문명과 진화하는 진보를 비판해 왔다.

102:8.6 개인 종교가 인간의 도덕의 진화를 앞서지만, 제도적 종교는 인류의 관습 뒤에 변함없이 처졌다는 것을 기록하는 것은 유감이다. 종교의 발전에서 보통, 선지자들이 사람들을 이끌었다. 신학자들은 보통, 사람들이 나아가지 못하게 붙들었다.

종교는 결코 기적 같은 것에 호소함으로 향상될 수 없다. 계시된 종교는 권위를 증명하려고 기적을 내세우지 않는다. 종교는 늘 개인의 체험에 뿌리를 내린다. 예수는 육체를 입고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을 찾아내는 필사 인간이었고, 사람을 찾아내는 하나님이었다. 그것이 네바돈 우주에서 지금까지 계시된 가장 높은 종교이다―나사렛 예수가 땅에서 살았던 인생이다.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이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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