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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3 편 종교적 체험의 실체



. 글쓴이 :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
. 기록시기 : 1934년


103:0.1 (1129.1) 사람의 참된 종교적 반응은 모두, 예배 보조자가 일찍부터 베푸는 봉사로 후원을 받고, 지혜 보조자의 검열을 받는다. 파라다이스 아들의 수여가 있은 뒤에, 해방된 진리의 영은 종교적 진리를 깨닫는, 인간의 능력을 키우는 데 힘차게 이바지한다. 생각 조절자는 인간이 가진 상급 부류의 종교적 통찰력을 개발시키는 데 더욱 참여한다.


103:0.2 인류의 종교적 성향은 타고난 것이다. 보편적으로 표현되고 자연 기원을 가진 듯하다. 원시 종교는 반드시 진화로 창시된다. 천천히 움직이는 행성의 진화 과정에 진리의 정기적 계시가 때때로 끼어든다.


103:0.3 (1129.3) 유란시아에는 오늘날 네 종류의 종교가 있다:


1. 자연 종교 (진화 종교)

2. 초자연 종교 (계시 종교)

3. 실제의 종교 (자연 종교와 계시 종교의 혼합)

4. 철학적 종교 (철학으로 생각해낸 신학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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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교에 담긴 철학


103:1.1 (1129.8) 한 사회 집단이나 민족 집단에서 종교적 체험이 일치하는 것은 하나님의 분신이 동일한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103:1.2 한 무리의 필사자는 영적 통일성을 체험할 수 있지만, 철학적으로 균일하게 될 수 없다. 이러한 다양성은 20세기의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종교에 대하여 500가지가 넘게 다르게 정의를 내렸다. 따라서 그러한 해석은 모든 다른 인간의 종교 철학과 온전히 달라야 한다.


103:1.3 한 필사자가 동료 필사자의 종교 철학에 완전히 찬성할 때, 이는 두 존재가 철학적ㆍ종교적 해석에 관하여 비슷한 종교적 체험을 겪었음을 가리킨다.


103:1.4 너의 종교는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문제이지만, 너의 종교 생활이 이기적이고 비사회적으로 되는 것을 막을 목적으로, 너는 방대한 다른 종교적 체험을 이해하는 지식을 얻어야 한다. 종교는 1차적으로 가치 기준의 추구이며, 다음에 해석하는 관념 체계가 형성된다. 이것이 어째서 종교가 서로 충돌하는 수백 가지 교리를 유지하면서, 한편 가치 기준과 목표에 찬성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종교적 관념에 혁신적 변화가 있는데도 종교는 버틴다. 신학은 종교를 낳지 않는다. 종교가 신에 관한 철학을 만들어 낸다.


103:1.5 종교는 체험과 종교적 생각에 기초를 둔다. 신학, 즉 종교에 관한 철학은 그 체험을 풀이하려는 정직한 시도이다. 그렇게 해석하는 관념은 옳거나 그를 수 있고, 아니면 진실과 잘못이 섞일 수도 있다.


103:1.6 (1130.5)
영적 가치 인식을 깨닫는 것은 초월 체험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라 부르기로 작정한 이 “감각,” “느낌,” “직관,” 또는 “체험”을 가리키는 데 이용될 수 있는 아무런 낱말이 어느 인간 언어에도 없다. 사람 속에 거하는 하나님의 영은 성격을 가지지 않았다 (조절자는 선인격). 그러나 이 훈계자는 가치를 제시하고, 신성의 맛을 풍기며, 가장 높고 무한한 의미에서 성격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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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종교와 개인


103:2.1 (1130.6) 종교가 나타나기 전에, 체험 속에서 사람은 종교를 깨달았다. 종교의 “출생”은 갑작스럽지 않고, 오히려 차츰차츰 솟아나는 것이다. 너희는 영에게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허다한 영적 출생에 영의 고통이 많이 따르고 심리적 동요의 표시가 생긴다. 다른 영적 출생은 영적 체험이 높아짐과 함께, 최고의 가치를 인식하는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성장이다. 의식해서 기울이는 노력, 그리고 분명한 개인적 결심이 없이는 아무런 종교적 발전이 일어나지 않는다.


103:2.2 부모에 의해 하늘 아버지의 자녀라는 의식에서 자랐던 사람들은 심리적 위기를 통해 하나님과의 친교를 겨우 의식할 수 있는 필사 동료들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103:2.3 한 아이의 도덕적 성품을 첫번째로 자극하는 것은 남녀 차이, 죄의식, 개인적 자부심이 아니라, 정의 및 공평의 충동, 친절―동료들에게 유익한 봉사―를 베풀려는 충동과 상관이 있다. 그러한 초기 도덕적 깨우침이 길러질 때, 갈등ㆍ격변ㆍ위기가 없는 종교 생활의 점진적인 발전이 이루어진다.


103:2.4 인간은 누구나 아주 일찍부터 자기 이기적 충동과 이타적 충동 사이에 갈등을 체험한다. 그런 도덕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흔히 하나님을 의식하는 첫 체험을 얻을 수 있다.


103:2.5 어린아이의 심리 상태는 부정적이 아니라, 자연히 긍정적이다. 허다한 필사자가 부정적인 것은 그렇게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긍정적이라고 할 때, 그의 도덕적 충동을 언급하며, 이 지성(mind)의 힘이 솟아나는 것은 생각 조절자가 도착했음을 알린다.


103:2.6 (1131.5) 그릇된 가르침이 없는 가운데, 정상 아이는 종교적 의식이 고개를 들면서, 도덕적 올바름과 사회 봉사를 향하여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종교적 체험이 발달하면서 갈등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불가피한 인간 의지의 결정ㆍ노력ㆍ기능이 항상 존재한다.


103:2.7 도덕적 선택에는 많든 적든, 도덕적 갈등이 보통 따른다. 아이의 정신 속에서 맨 처음에 생기는 바로 이 싸움은 이기심의 욕구와 이타심의 충동 사이에 생긴다. 생각 조절자는 이기적 동기를 가진 성격의 가치 기준을 무시하지 않지만, 인간의 행복을 얻는 목표에 이르고, 하늘 나라의 기쁨에 이르는 것으로서, 이타심의 충동을 조금 더 우대하도록 작용한다.


103:2.8 한 도덕적 존재가 이기심의 욕구가 있는데도 사심 없이 되기를 선택할 때, 그것은 원시 종교의 체험이다. 그러한 결정은 인간답고도 종교적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실을 용납하고, 사회에 봉사하려는 충동을 나타내며, 이 충동이 사람의 형제 정신의 기초이다. 자유 의지 행위로 머리가 올바른 도덕적 판단을 내릴 때, 그러한 결정은 종교적 체험이 된다.


103:2.9 어린아이가 도덕적 능력을 얻고, 이타적 봉사를 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장하기 전에, 그는 이미 튼튼하고 잘 통일된 이기적 성품을 개발하였다. 이 상황이 “높은” 성품과 “낮은” 성품 사이에, “죄 많은 늙은이”와 은혜로운 “새 성품” 사이에 싸움이 있다는 이론을 낳는다. 일생에 아주 일찍부터 정상인 어린아이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한다.


103:2.10 사람은 제 실속을 찾는 욕구를 자아―그 자신―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반대로 이타심을 가지려는 의지를 제 몸 바깥에 있는 어떤 영향―하나님―과 동일시하고 싶어 한다. 이타심의 욕구는 깃드는 생각 조절자의 인도하심에 실제로 기원을 가진다. 적어도 이것이 어린아이의 머리속에서 일찍부터 생기는 근본적 체험이다. 자라는 어린아이가 통일된 성격을 얻지 못할 때, 이타심의 욕구가 너무 지나치게 자라서 자아의 복지에 심각한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 잘못 인도된 양심은 많은 갈등ㆍ걱정ㆍ슬픔, 그리고 인간의 끝없는 불행의 원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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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종교와 인류


103:3.1 (1132.1) 초기 인간 정신의 도덕적 성품에서 생기는 이기심ㆍ이타심의 갈등은 집단 관계에서 제시되었다. 그러나 사회 집단은 종교적 체험의 근원이 아니다. 참된 종교적 충동은 사심 없이 되려는 의지를 촉진하는 영의 존재에서 생겨난다.


103:3.2 진화하는 종교는 개인이 사회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얼마큼 몸소 희생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더 행복하고 더 풍족하게 만들기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궁극에 종교는 하나님과 사람이 베푸는 봉사가 되도록 정해졌다.


103:3.3 종교는 사람의 환경을 바꾸도록 설계되어 있지만, 환경이 흔히 종교를 지배해 왔다.


103:3.4 어느 시대의 종교에도 지극히 중요한 체험은 신학적 교리나 철학 이론이 아니다. 도덕 개념이 마술 요소를 대체함에 따라서 종교는 유리하게 진화한다.


103:3.5 사람은 귀신 공포증, 동물숭배와 같은 미신을 거쳐 여러 가지 예식을 개발하였고, 이러한 예식은 부족 신앙으로 구체화되었다. 궁극에 이 두려움과 신앙은 신으로 성격화되었다. 그러나 모든 종교적 진화에서 결코 도덕 요소가 통째로 누락된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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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영적 친교


103:4.1 (1133.1) 사회의 행사와 종교적 모임의 차이는 후자가 친교의 분위기에 젖는 것이다. 초기의 종교들은 희생물의 얼마큼을 예배자들이 먹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기독교에서도 주의 성찬은 이 형태의 친교를 유지한다. 친교 분위기는 이기적 자아와 깃드는 영 훈계자의 이타적 욕구의 싸움에서, 신선한 느낌을 주고 위로하는 휴전 기간을 마련해 준다. 이것이 참된 예배에 이르는 전주곡이다―하나님의 계심을 연습하는 것이요, 궁극에 사람의 형제 정신이 태어나게 만든다.


103:4.2 하나님과 친교가 중단되었다고 느꼈을 때, 원시인은 친교를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어떤 희생 동물을 바치곤 하였다. 의에 대한 굶주림과 갈증은 진리의 발견으로 이어지고, 진리는 이상을 증대시키고, 이것은 개별 종교인들에게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103:4.3 죄를 지은 느낌은 영적 교통이 중단되거나 사람이 도덕적 이상을 낮추는 데서 생긴다. 사람의 가장 높은 도덕적 이상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비슷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람은 하나님을 찾아내고, 갈수록 더 그를 닮아가는 목표에 충실할 수 있다.


103:4.4 예수는 희생물을 바치고 속죄하는 예식을 쓸어버렸다. 인간과 창조자의 관계는 자식과 부모의 기초 위에 놓여 있다. 하나님은 필사 아들딸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된다. 그러한 친밀한 가족 관계의 정당한 부분이 아닌 모든 예식은 영원히 취소된다.


103:4.5 아버지 하나님은, 자식의 실제 미덕이나 자격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니라, 동기, 즉 사람의 목적과 의도를 인식한다. 자식인 사람을 다룬다. 신의 사랑이 부모와 자식 관계를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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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상의 기원


103:5.1 (1133.6) 초기의 진화적 지성은 사회적 의무와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느낌이 일어나게 만든다. 이타주의의 이상은 신다운 영의 충동에서 파생된다.


103:5.2 원시인은 그를 이웃으로 다루는 자들만 이웃으로 여긴다. 종교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서, 이웃 개념은 씨족ㆍ부족ㆍ나라를 포함하도록 커진다. 예수는 (적을 사랑하기까지) 온 인류를 포함하도록 이웃의 규모를 크게 만들었다.


103:5.3 인본주의자는 이타심의 욕구를 지성의 자연스러운 작용으로 돌린다. 종교가는 필사 지성이 가진 참으로 사심 없는 욕구는 생각 조절자가 안에서 영적으로 인도하심에 반응하는 것이라고 더 바르게 인식한다.


103:5.4 그러나 자아 의지와 자아를 넘는 의지의 초기 갈등에 대한 인간의 해석이 항상 신뢰할만한 것은 아니다. 상당히 잘 통일된 성격자가 자아의 갈망과 싹트는 사회의식이 여러 모습으로 다투는 것을 중재할 수 있다. 개인적인 관심과 봉사를 독점할 수 없다.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초기 형태의 죄책감이 생긴다.


103:5.5 오로지 자존심의 욕구와 이타적 욕구가 절충될 때에야 인간의 행복을 얻게 된다. 진화 인간의 지성은 감정적 충동의 자연스러운 증가, 그리고 영적 통찰력에 바탕을 둔 사심 없는 욕구의 도덕적 성장, 이 둘 사이의 싸움을 심판하는 까다로운 문제에 늘 부딪친다.


103:5.6 (1134.4) 자아를 위해서, 그리고 최다수의 타아를 위해서 만족스럽게 풀 수 없는 문제이다. 예수는 이렇게 그러한 역설을 언급하였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는 자는 잃겠거니와 누구든지 하늘나라를 위하여 제 목숨을 버리는 자는 얻으리라.”


103:5.7 이상을 추구하는 것―하나님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죽기 전과 후에 이어지는 노력이다. 이 생명에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좋은 일이 앞날의 생명을 향상하는 데 바로 기여한다. 참된 종교는 필사자가 수명이 있는 동안에 앞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노력을 헐뜯지 않는다.


103:5.8 모든 이타적 충동이 군집 본능에서 발달된 것이라 가르치는 것은 이상주의의 싹을 자른다. 이타적 욕구가 조절자로부터 방출된다는 것을 알 때, 사람은 힘차게 에너지를 얻는다.


103:5.9 영원하고 신다운 무엇이 자기 속에 살며 애쓴다는 것을 깨달으면, 사람은 자아보다 높이 올라간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얻고 사람이 형제라는 느낌을 현실로 만든다.


103:5.10 사람은 자기의 영적 분야에서 자유 의지가 있다. 아주 참되게 말하면, 사람은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설계하는 자이다.


103:5.11 (1135.1)
그러나 사람은 압력을 받는다고 구원을 얻거나 고귀하게 되지 않는다. 영의 성장은 진화하는 혼속에서 일어난다. 압력을 가하면 성격을 비뚤어지게 만들지 모르지만, 결코 성장을 자극하지 않는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도다.” 사람은 가정과 공동체, 교회와 국가의 압력이 가장 적을 때 가장 좋게 성장한다.


103:5.12 한 종교 집단의 안전은, 동질의 신학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통일되는 데 달려 있다. 한 종교 집단은 자유롭게 생각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어떤 교회든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람이 형제인 것이 옳다고 인정하고, 감히 그 구성원에게 어떤 교리의 압력도 주지 않는다면 큰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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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철학적 조정


103:6.1 (1135.3) 신학은 인간 지성의 행동과 반응을 연구하는 것이다. 신학은 결코 하나의 과학이 될 수 없다.언제나 너의 종교를 연구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종교를 연구하는 것은 심리학이다.


103:6.2 바깥에서 우주를 연구할 때 사람은 자연 과학을 만들어낸다. 자신과 우주를 안에서 접근할 때, 신학과 형이상학이 생겨난다. 이 두 가지 방법에서 처음에 나타나는 차이점을 조정하기 위하여 철학이 발달한다.


103:6.3 사람의 영적 성품은 우주를 안에서 내다보는 기회를 주며, 모든 창조를 영적인 것으로 보게 된다.


103:6.4 지성으로 우주를 분석할 때, 우주는 기계적이고 물질인 듯하다.


103:6.5 과학이나 종교는 결코 혼자 힘으로, 인간 철학의 안내가 없이, 신의 계시의 빛을 받지 않고서, 보편적 진리 및 관계를 적절히 이해하기를 바랄 수 없다.


103:6.6 (1136.1) 영적인 것과 물질인 것, 인간의 속 체험과 바깥 체험은 지성의 기능에 달려 있고, 지성의 활동에 제약을 받는다. 사람은 머리 속에서 물질을 체험하며, 영적 체험을 머리 속에서 의식하게 된다. 사람은 에너지 및 사물과 영적 가치를 머리의 매체를 통해서 파악한다.


103:6.7 너희가 과학과 종교를 조화시키기 어려운 것은 상물질 분야를 너희가 까맣게 모르기 때문이다. 지역 우주는 물질ㆍ상물질ㆍ영으로 실체가 명시되는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과학에서는 이치를 따지며, 종교에서는 믿음으로 통찰력을 얻으며, 상지혜는 상물질 단계의 기법이다. 형이상학은 상물질계의 상지혜의 부재를 메우려고, 좋은 의도였지만 사람이 쓸데없는 노력을 기울인 것을 가리킨다.


103:6.8 형이상학은 실패였고, 사람은 상지혜를 파악할 수 없다. 상지혜의 부재를 메울 수 있는 것은 계시뿐이다.


103:6.9 과학은 사람이 물리적 환경을 연구하는 것이다. 종교는 영적 가치가 있는 우주를 체험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키려고 철학이 개발되었다. 상지혜가 없는 상황에, 계시로 분명해진 철학은 적절히 활동한다.


103:6.10 문명화된 사람은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한, 아주 예전의 그리스인과 수메르인의 발걸음을 갈수록 더 따라갔다. 그리고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서, 철학은 영 개념과 에너지 개념 사이에 항상 벌어지는 틈에 다리를 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공간 시대에 이 여러 차이점은 최상위 안에서 조화된다.


103:6.11 (1137.1) 종교는 언제까지나 믿음에 의존한다. 그리고 자연 세계와 영적 세계 현상의 잘못된 해석, 과학과 종교라고 잘못 부르는 것들이 언제나 있어 왔고, 늘 있을 것이다.


103:6.12 필사 인간에게는 상물질 지성 및 물질에 관한 개념이 모자란다.


103:6.13 계시는 진화 인간이 상물질 간격을 메우는 유일한 희망이다. 상지혜의 도움 없이, 믿음과 이치는 합리적 우주를 파악하고 연구할 수 없다. 상지혜의 통찰력이 없이 선ㆍ사랑ㆍ진리를 헤아릴 수 없다.


103:6.14 사람의 철학은 물질에 치우칠 때, 합리주의나 자연주의가 된다. 영적 방향으로 치우칠 때, 철학은 신비주의가 되기도 한다.


103:6.15 필사인이 도달하는 최고의 철학은 과학의 이성에, 종교의 믿음에, 진리를 알아보는 통찰력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이러한 통합으로 개발되지 못한 형이상학과 이해하지 못하는 상물질의 상지혜의 간격을 보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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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과학과 종교


103:7.1 (1137.6) 이성을 따지는 것은 과학을 지탱하고 신앙은 종교를 지탱한다. 인간의 종교적 통찰력은 오로지 계시함으로 사람에게 확실히 가르칠 수 있고, 필사자가 조절자의 계심을 몸소 겪어야 깊어질 수 있다.


103:7.2 참된 구원은, 물질, 상물질 분야를 거쳐서, 영적 상호 관계가 있는 높은 우주 상태에 이르기까지, 필사 지성을 신답게 진화시키는 기법이다. 이 천상의 진화는 일시적 인간의 잠재성을 실제로, 신다운 영원한 인간, 파라다이스 최후자로 변화시키는 사업이다.


103:7.3 사람이 지역 우주와 초우주를 올라가는 체험은, 적지 않게 에너지의 변질과 물질 변형의 연구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지만, 신은 하나 되는 것이요, 신의 유한 수준, 최상 존재가 솟아나면서 통일된다.


103:7.4 체험적 철학의 중재로 과학적 태도와 종교적 통찰력을 연합하는 것은 사람이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오랜 체험의 일부이다.


103:7.5 논리는 과학의 발견과 종교의 통찰력을 조화시키는 데 결코 성공할 수 없다.


103:7.6 (1138.4) 논리는 철학의 기법이요, 철학의 표현 방법이다. 참 과학의 분야 안에서, 추리는 반드시 진정한 논리에 순종한다. 공동으로 철학의 논리와 접촉함으로, 과학과 종교, 이 두 가지가 갈수록 서로에게 관대해지면서 회의적이지 않을 수 있다.


103:7.7 발달하는 과학과 종교가 필요한 것은 두려움 없는 자아비판이요, 진화적 지위의 불완전함을 더욱 크게 인식하는 것이다. 과학과 종교의 스승들은 흔히 너무 자신 있고 독단적이다. 과학과 종교는 오로지 그들이 가진 사실에 대하여 자체를 비판할 수 있을 뿐이다.


103:7.8
진리―우주 사실 및 영적 가치의 이해―는 진리의 영 이 베푸는 봉사를 통해서 얻는 것이 최선이고, 계시로 비평하는 것이 최선이다.


103:7.9 과학은 사람이 물리적 환경을 어느 정도 지배할 수 있게 만든다. 영적 체험을 주는 종교는 문명이 복잡한 와중에서 사람들이 함께 살도록 만든다. 서로 의존하는 이 생각 분야들을 논리 있게 서로 연결지어서, 과학적으로 안정되고 종교적으로 확실한, 잘 균형된 철학으로 만드는 인간의 노력을 가능하게 한다.


103:7.10 필사자의 지위에서는 아무것도 절대로 증명할 수 없다. 과학과 종교 모두가 가정(假定)에 바탕을 둔다. 상물질 수준에서 과학과 종교의 여러 가설은 상지혜 논리로 어느 정도 증명이 가능하다.


103:7.11 (1139.3) 물질ㆍ움직임ㆍ생명, 이 세 가지 실체를 가정함으로, 과학은 자랑스러운 추리를 시작한다. 종교는 지성ㆍ영ㆍ우주―즉 최상 존재―이 세 가지가 정당함을 가정하고서 시작한다.


103:7.12 과학은 공간에서 시간적 에너지와 물질을 다루는 수학이다. 종교는 유한한 현세의 영 뿐 아니라 영원한 최고의 영(신)을 다룬다. 오로지 상지혜를 오랫동안 겪는 체험을 통해서, 우주를 비슷하게 풀이하도록 만들 수 있다. 일곱 으뜸 영의 회로에는 에너지와 영의 분산이 최대로 조화되어 있다. 최상위의 신 속에 에너지와 영이 처음으로 통일되고, 첫째 근원 중심, 스스로 계신 이의 무한 속에 최종으로 통일된다.


103:7.13 이성을 따지는 것은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서, 그 세계와 함께 겪는 체험에 관하여, 의식이 내리는 결론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믿음은 영적 의식―필사자가 달리 증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정당함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103:7.14 생각 조절자의 계심은 영적 실체가 있다는 증명이다. 그러나 이 계심이 타당한 것을 바깥 세계에 증명할 수 없고, 이처럼 하나님이 깃드심을 체험하는 사람에게만 설명할 수 있다.


103:7.15 과학은 물질 세계를 발견하고, 종교는 그 세계를 평가하고, 철학은 과학의 물질적 관점과 종교의 영적 개념을 조정한다. 그러나 역사(歷史)는 과학과 종교가 결코 완전히 의견이 같을 수 없는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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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철학과 종교


103:8.1 (1140.1) 과학과 철학이 논리로 하나님이 있음직하다는 것을 가정할지 모르지만, 종교적 체험만이 성격을 가진 최상의 신이 확실히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03:8.2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은 타당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에 관한 대화는 지적ㆍ철학적이니까 때때로 혼란을 일으킨다.


103:8.3 아내를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하는 남자라도 애정 심리학 필기시험에 낙방할지 모른다. 배우자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다른 남자는 그 시험에 합격할 수도 있다.


103:8.4 너희가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과학의 주장, 논리로 트집 잡기, 철학의 가설 등, 하나님 없는 종교를 만들려는 자들의 제안에 흔들리지 말라.


103:8.5 하나님을 아는 신자의 확신은 의심하는 유물론자의 불확신에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신자의 깊은 믿음과 체험에 따른 흔들리지 않는 확신으로 불신자의 불 확신성에 강력히 도전해야 한다.


103:8.6 (1140.6)
철학이 과학과 종교 양자에게 최대의 도움을 주려면, 유물론(materialism)과 범신주의(pantheism)의 두 극단을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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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종교의 본질


103:9.1 (1140.7) 신학은 종교의 지적 내용을 다루고, 형이상학(계시)은 철학적 모습을 다룬다. 종교적 체험은 종교의 영적 내용이다. 종교의 철학적 내용의 정치적 왜곡과 사회ㆍ경제적 변질이 있는데도, 개인적 종교에서 얻는 영적 체험은 여전히 진정하고 타당하다.


103:9.2 사람의 신학이 아무리 착각이고 그릇되더라도, 사람의 종교는 전적으로 진정하고 영구히 참될 수 있다.


103:9.3 최초의 불교는 유란시아의 역사를 통틀어서 신이 없는 최선의 종교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 없는 종교는 하나의 철학적 모순이요 지적 부조리이다.


103:9.4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은 마침내 종교에서 마술을 믿는 미신, 신화(神話)의 환상, 전통적 독단의 사슬을 벗겨 버렸다.


103:9.5 종교적 체험은 순전히 영적ㆍ주관적 현상이지만, 그러한 체험은 우주의 객관적 실체의 가장 높은 영역을 향하여 분명하고 생생한 믿음의 태도를 받아들인다. 진정한 종교적 체험은 구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배우고 행하는 일에만 관여한다. 그러한 종교를 가졌다는 표시는, 최상의 신을 믿는 믿음, 영원히 살아남는다는 희망, 그리고 사랑, 특히 동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103:9.6 (1141.4)
신학이 종교의 주인이 될 때, 종교는 죽는다. 신학의 사명은 단지 개인의 체험적 주장을 정의. 명확화, 설명 및 정당화하려는 종교적 노력이며, 마지막 분석에서 살아있는 신앙으로만 입증할 수 있다. 이성과 지혜와 믿음은 인간의 가장 높은 성취이다. 이성은 인간에게 사실의 세계, 사물을 소개하며, 지혜는 진리의 세계, 관계를 소개한다. 신앙은 사람을 신성과 영적 체험의 세계로 인도한다.


103:9.7 신앙은 이성이 갈 수 있는 데까지 기꺼이 데리고 가며, 철학의 한계 끝까지 지혜와 함께 계속 간다. 다음에 신앙은 오직 진리의 동반을 받으면서, 한이 없는 우주여행 길을 떠난다.


103:9.8 종교(개인이 영적으로 체험하는 진실)는 신앙이 유효하고,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다는 내재된 (생각 조절자) 가정 위에 근거를 둔다.


103:9.9 필사 인생의 현실을 충분히 깨닫는 것은 이성ㆍ지혜ㆍ신앙, 이 세 가지의 가정을 점진적으로 기꺼이 믿으려 하는 태도에 있다. 그러한 삶은 진리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고 사랑에 의해 지배되는 삶이다. 이것들은 실존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객관적인 우주 현실의 이상이다.


103:9.10 지혜가 옳은 것과 그른 것, 진리와 잘못 사이에서 선택할 때, 지혜는 영의 인도하심을 보여준다. 이처럼 지성ㆍ혼ㆍ영의 활동은 늘 가까이 연합되고, 기능 면에서 서로 연결된다. 진리를 통해서 사람은 아름다움에 이르고, 영적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선의 높이까지 올라간다.


103:9.11 (1142.2) 신앙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길로 이끈다. 신앙은 그 감정적 결과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참된 종교는 만족스러운 감정일 뿐 아니라, 믿고 아는 체험이다.


103:9.12 종교적 체험에는 그 영적 내용에 비례하는 한 실체가 있으며, 그러한 실체는 인간의 모든 다른 성취를 뛰어넘는다. 그러한 체험으로 얻은 확신은 무너질 수 없고, 종교적 생활의 논리는 사람이 반박할 수 없다. 그 만족감은 극도로 신성하고, 그 용기는 꺾을 수 없고, 그 헌신에 의심이 없으며, 그 충성은 더할 나위 없고, 그 운명은 최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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